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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루] 겨울비 정류장 01





 흰 티셔츠에 묻은 흙먼지 자욱을 손으로 꾹 문질러 닦는다. 그래봤자 옷만 더 더러워질 뿐이다. 그뿐이랴. 손까지 더러워졌다.

 

 집에 가면 에이스한테 또 혼나겠다. 입을 비죽인 루피는 몸 매무새를 다듬는 것을 포기하고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는다. 하루이틀 듣는 잔소리도 아니고,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그리 생각하니 가뿐해진다.

 

 운동화를 끌며 타박타박 걷다보니 콧잔등으로 뭔가가 톡 떨어진다. 슬쩍 만져보니 물방울이다. 비가 오려나. 고개를 들어 하늘은 본다. 어느 샌가 먹구름이 가득 몰려 하늘이 어둑해져있다.

 



 

우산 없는데…….”

 



 

 중얼거리며 패딩 후드를 대강 뒤집어쓴다. 그러기가 무섭게 톡, 토독, 하고 빗방울들이 연거푸 떨어진다. 잘게 오던 비는 곧 쏟아져내리는 장대비로 바뀐다. 순식간에 쫄딱 젖어버린 루피는 망연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씩 웃는다. 걱정하던 티셔츠도 흠뻑 젖어 흙 자국이 보이지 않게 됐다.

 

 에이스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루피는 멈춰섰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발걸음이 조금 전과는 달리 꽤 가볍다.

 

 한참 걷다가 이윽고 버스 정류장에 멈춰선다. 다행히 지붕이 있는 공간이 마련된 정류장이다. 루피는 후다닥 달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간다.

 

 후드를 벗고 전광판에 비치는 다음 버스의 도착 시간을 확인한다. 12. 아무래도 조금 전에 버스가 출발했던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사보가 신신당부했던 귀가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

 

 



콜록콜록.”

……?”

 



 

 자신의 것이 아닌 낯선 기침소리에 루피는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벤치에 미처 보지 못했던 남자 아이 하나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어림잡아 고등학생 정도. 딱 루피의 또래이다.

 



 

콜록…. 하아.”



 

 

 눈 밑이 시커먼 것이, 굉장히 병약해 보이는 아이이다. 게다가 피부도 무척 창백하고. 자세히 보니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에 옷차림도 가볍다. 청바지에 달랑 후드티 하나라니. 그런 차림새로 루피와 다를 바 없이 쫄딱 젖어있는 것이, 이 한겨울에 저러고 다녀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니 저렇게 기침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루피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자신도 막 싸움박질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지만, 그래도 다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런데 저 녀석은 멀쩡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이니. 싸움에서 진 건가?

 



 

.”

 



 

 루피의 부름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린다. 정면으로 보니 정말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루피는 머뭇거리다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남자아이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너 어디 학교야? 이 주변 학교? 그러고 다니면 안 추워?”

…….”

 



 

 루피를 경계하는 것인지 대답이 없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타고난 루피는 그 따위 것이야 전혀 개의치 않는다.

 



 

너 싸움 되게 못하나 보다. 으히히, 나도 어릴 땐 그랬는데. 너 이름이 뭐야?”

…….”

난 루피. 저쪽 ○○고 다니는데, 혹시 너도 우리 학굔가?”

…안 다녀.”

 

 



 이제야 겨우 입을 연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꽤나 갈라져있다.

 



 

학교 안 다녀.”

진짜?! ? 재밌는데. 친구들도 있고. 밥도 주는데.”

…….”

그렇구나. 그래서 교복을 안 입고 있는 거야? 흐음.”

 

 



 다시 입을 다물어버린 남자아이가 루피의 몸을 훑는다. 두터운 패딩에 단추는 죄 풀어헤친 셔츠하며, 그 속으로 보이는 심플한 디자인의 티셔츠. 마지막으로 비에 젖어있는 교복 바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잠시 부러움의 빛이 스친다.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남자아이가 다시 기침을 콜록거린다. 이번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꽤 심각하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갈라진 소리까지 나고 만다.

 



 

, 너 괜찮은 거야? 너 금방 죽을 것 같애.”

안 죽어.”

많이 추워? 이거 입을래?”



 

 

 루피가 선뜻 자신의 패딩을 벗어 남자아이에게로 건넨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됐어. 너 입어.”

? 괜찮아! 난 추위 안 타.”

…….”

 



 

 그렇다지만 드러난 루피의 옷차림이 너무나도 얇다. 티셔츠 한 장과 걸치지 않느니만 못한 얇은 교복 셔츠.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남자아이가 다시 한 번 단호히 고개를 젓지만, 씩 웃은 루피가 덥석 그의 품으로 패딩을 안겨준다.

 



 

넌 환자잖아. 사보가 그러는데, 환자한테는 배려가 필요하댔어.”

 



 

 루피의 입에서 나오는 배려의 발음이 다소 부자연스럽다. 아마 평소에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일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 챈 남자아이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만다. 그러자 루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 너 웃기도 하는구나? 인상만 무지막지하게 찌푸리고 있길래 전혀 안 웃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로우.”

 



 

 루피의 패딩을 제 어깨 위로 걸치며 남자아이가 툭 말을 던진다.

 



 

내 이름. 로우야.”

로우. 으음.”

그리고,”

 

 



 다시 한 번 잔기침을 콜록인 로우가 마저 말을 잇는다.

 

 



싸운 거 아냐. 그냥 맞은 거지.”

그게 그거 아냐?”

달라. 난 싸움에선 지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아파 보이는 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한다. 하지만 루피는 조용히 침묵해준다. 그냥 흐음, 하고 반응을 보일 뿐.

 



 

그 남자한테 반항하면 대가는 배로 돌아오니까. 현재로선 성인인 그 남자를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그렇다고 그걸 맞고 있어? 나라면 그 사람한테 이길 때까지 계속 덤빌 거야.”

그러면 쓸데없이 내 몸만 축나니까. 적당히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루피는 영 동의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반응에 로우가 쓰게 웃는다.

 



 

가끔은 기다리는 게 답일 때도 있는 거다.”

그으래? 하긴, 밥도 기다려야 완성이 되니까. 밥이 다 지어질 때까지 밥솥을 열면 안 된댔어.”

…….”

 



 

 장난인가 싶기도 하지만, 루피의 표정은 진지하다. 그게 오히려 재미있다. 결국 로우는 참지 못하고 웃고 만다. 작게 쿡쿡거리는 웃음소리에 루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가 저도 로우를 따라 소리내어 웃는다.

 

 



, 버스 왔다.”

이거─

 



 

 로우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루피의 옷을 끌어내린다. 그러나 그걸 채 내밀기도 전에 루피가 열리는 버스의 앞문을 향해 훌쩍 달려가버린다.

 



 

너 입고 가. 너 되게 추워 보여.”

?”

“○○고 1학년 5. 나중에 돌려주러 와. 다음에 보자, 로우!”

 



 

 제멋대로 줄줄이 늘어놓고서는 그대로 버스와 함께 떠나버린다. 그 모습을 답지 않게 멍하니 쳐다보던 로우가 뒤늦게 몰아닥친 당혹감을 수습한다. 대체 저건 뭐지..?

 



 

……나보다 어리잖아.”

 



 

 작게 중얼거리던 로우가 자신의 손에 들린 패딩을 내려다본다. 로우라면 절대 입지 않을 새빨간 색의 패딩. 가만히 바라보던 로우는 천천히 패딩 속으로 팔을 꿰어 입는다. 한기에 슬슬 떨리기 시작하던 몸에 금방 따스한 온기가 돈다. 그것이 마치, 고작 10여 분만에 로우에게 혼란을 남기고 떠난 루피의 느낌과 닮아있다.

 

 패딩의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뭔가 딱딱한 것이 들어있음을 알아차린다. 밖으로 끄집어내니 핸드폰이다. 영 산만하다 싶더니, 결국 자신의 핸드폰까지 덜컥 남에게 맡겨버리고 간 건가. 이렇게 되니 정말 돌려주러 가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에겐 낯선 물건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로우는 아래쪽에 부착된 버튼을 눌러본다. 그러자 현재 시간과 함께, 남자 둘 사이에 끼어 환하게 웃고있는 루피의 사진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운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조작법을 몰라 그저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으니 화면이 꺼진다. 그리고 까맣게 변한 화면 위로 로우 외의 또 다른 남성의 얼굴이 비친다.

 

 흠칫 놀란 로우가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우산을 들고 선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씩 웃는다.

 



 

여기 있었군, 로우.”

…….”

그 옷이랑 핸드폰은 웬 거지? 이젠 도둑질까지 하나?”

그런 거 아냐. 잠시 맡아둔 물건이다.”

훗훗.”

 



 

 남자의 까만 우산이 로우에게로 살짝 기울어진다. 로우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도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찾느라 고생 좀 했다고? 설마하니 이런 먼 곳까지 와있을 줄이야.”

…….”

뭐 할 말 없나?”



 

 

 로우의 입술 모양이 조금 일그러진다.

 



 

……미안하게 됐군.”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천천히 그러쥔다. 따스한 온기. 루피가 남기고 떠난 고등학교의 이름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되새긴다. 반드시 모두 돌려주러 가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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