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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루] 내 해적선엔 무슨 일이지 밀짚모자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작성된 항해일지를 뒤적이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베포의 손자국이 정말로 내가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먹먹한 느낌이 가시질 않아 종이에 말라붙은 발자국을 조심스레 손으로 쓸어보는데,


"선장!!!!"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
"큰일이에요, 선장!!"
"……."
"……크, 큰일이…."


말없이 빤히 바라보니 펭귄이 움찔거리며 말을 더듬는다.
점점 불그스름해지는 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정말 내 해적단에게로 돌아온 게 맞긴 하구나.


"무슨 일이냐."
"아, 네! 느닷없이 밀짚모자가 들이닥쳤습니다!!"
"……뭐가?"
"밀짚모자 루피요!"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드레스로자 건이 마무리되고 동맹이 끝난지 벌써 수 일이다.
제각기 갈 길을 떠났으니 당분간은 밀짚모자와 만날 일이 전혀 없을 터였다.

충동적으로 계획에 끌어들인 밀짚모자는 확실히 내 기대 이상이었다.
그 덕분에 간당간당하게 제정신을 유지하느라 바빴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한숨이 자동으로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이제 그 녀석과는 볼일 없어. 돌려보내."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게-"
"트랑아!!"


안절부절하던 펭귄이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대신 자리에 서있는 건 해맑게 웃고 있는 밀짚모자였다.
향수에 젖어있던 정신이 왜인지 급격히 피폐하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내 배에는 무슨 일이냐."
"놀러왔어! 트랑이 얼굴도 볼 겸 해서!"
"나가."
"싫어."


내 말은 쥐똥만큼도 담아 듣지 않는 얼굴로 코를 후비적거린다.
뒷목이 살살 당겨왔다.
그는 내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로 인해 내가 맞이할 최후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음은 분명했다.
그 때문에 밀짚모자에게는 나름의 감사를 느끼고는 있다.
헤어지기 직전에 내 입에 축하 케이크를 쑤셔넣지만 않았어도, 내게 있어 그는 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거다.
망할 자식.


"너와의 동맹은 끝났어. 더 이상 너와는 볼일이 없다."
"무슨 소리야? 난 그렇게 정한 적 없는데."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와 나는 이제 적이다."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밀짚모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확실히 너랑은 원피스를 두고 싸워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친구잖아?"
"누가."
"트랑이랑 내가!"


실실거리는 웃음소리도 꽤 간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수하게 웃는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4억의 수배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틈엔가 경계심이 흐트러지곤 했다.
그 점이 그의 무기라면 무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이 허물어지려는 경계심을 다시 곤두세웠다.
손에 쥔 노트를 덮으며 옆으로 치워두었다.


"꺼져라."
"여기가 트랑이의 방이야?"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밀짚모자가 제멋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잠시 방을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곰은? 간식 없어?"
"……."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

"이야, 너희 요리사가 한 밥도 꽤 맛있다. 더 줘."
"이것만 먹고 돌아가는 거지?"
"먹고 생각할래."


그의 입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말에 기가 찼다.
저게 지금 제 입에서 나올 말이기는 한 건가.


"이것만 먹고 돌아가야 돼…?"
"왜 그러는데?"
"그야……."


우리 캡틴 심기가 지금 무지 안 좋은걸.

딱 그런 말이 쓰여있는 얼굴로 베포가 나를 힐끔거린다.
나는 묵묵히 스프를 떠 입에 넣었다.
고소한 향을 음미하며 식도 너머로 천천히 삼키는데,


"아 참! 까먹고 있었다. 트랑아, 나 고백할 거 있어."
"큽……! 콜록, 콜록."
"선장!!"


급히 내 손에 쥐어진 물잔을 바로 들이켰다.
목에 걸렸던 스프를 간신히 삼키고 밀짚모자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래봤자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실 나 가출했거든. 그래서 널 찾아온 건데, 깜박하고 말을 안 했네."
"대체 머리가 어떻게 돼먹어야 그 상황에서 날 찾아올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어- 하지만, 그러라고 나미에게 준 거 아니었어?"


이거. 하며 밀짚모자가 내게 들어보인 것은 익숙한 모양의 비블 카드였다.
내가 베포에게 주었던 것의 짝이었다.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트랑이가 떠난 날 나미가 나한테 줬어. 이거라도 가지고 있으라고."
"무슨 소릴……. 돌려줘."
"싫어. 어, 고마워!"


샤치가 내미는 스프 접시를 받아들더니 순식간에 입 안으로 쏟아붓는다.
뜨겁지도 않은지 잘도 삼켜댄다.
비블 카드는 이미 녀석이 쓴 밀짚모자의 리본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떠날 때 저걸 진즉 회수했어야 됐다.


"그래. 그래서 뭘 어쩌라고."
"당분간은 여기 있을래."
"뭐?"


이게 돌았나.


"식사를 마치면 당장 나가."
"여기 있는다니까? 고기도 더 줘."
"밀짚모자야. 죽고 싶냐."
"아니. 어, 그건 뭐야? 나도 먹을래!"
"……."
"캐, 캡틴……."


스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밀짚모자에게 소릴 지를 것 같아 이를 꽉 악물었다.
도대체가 저 놈의 페이스는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사람 화를 돋구는데 아주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무너졌다간 또 다시 밑도 끝도 없이 녀석에게 말려버리게 될 것이 뻔했다.


"좋아. 방을 하나 내주지. 날이 밝으면 돌아가라."
"방? 트랑이 네 방에서 자면 안 돼?"
"싫어."
"싫어."
"……?"


생전 겪어본 적 없는 화법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흔들린 동공을 그 새 눈치 챘는지 밀짚모자가 씩 웃는다.


"트랑이 너랑 같이 잘래."
"……그냥 밥만 먹고 꺼져버려."
"나 너한테 할 말 무지 많아. 밤새 얘기하면 재밌겠다. 그치?"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거냐?"
"근데 곰도 같이 자? 야, 곰. 너도 악마의 열매를 먹었어?"
"밀짚모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선원 녀석들이 하나 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작 들어줬으면 하는 녀석은 쉴 새 없이 식탁의 음식을 집어먹기에 바빴다.
입 안 가득 쑤셔넣은 음식물을 꿀꺽 삼킨 그가 드디어 나를 돌아봤다.


"하여간 트랑이 너, 되게 짜증이 많다니까. 역시 잠이 부족한 거 아냐?"
"윽……!! 당장 내 배에서 나가!!!!"


스푼을 쥔 손으로 식탁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

질린 눈으로 죽어라 노려봐도 침대 위의 밀짚모자가 사라질 턱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제 모자 위에 내 모자를 겹쳐보며 '역시 털이 있는 편이 더 폭신폭신한가.'하는 헛소리나 지껄여댔다.
골이 지끈거리며 아파왔으나 애써 무시한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샤치가 심신안정의 효과가 있다며 내온 찻잔이 그나마 속을 가라앉혀주었다.


"트랑아, 안 자?"
"신경 꺼라."
"흐음. 눈 밑이 시커먼데."


짜증스럽게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일일이 대꾸해줄 가치도 없었다.
내가 응답을 않자 심심해진 밀짚모자가 책상으로 다가왔다.
머리에는 그의 상징과 함께 내 모자까지 겹쳐 쓰고서.


"뭐냐, 그 꼴은."
"트랑이 네 모자 무지 푹신하더라. 이히힛, 맘에 들었어."
"……그러냐."


모자 위에 모자를 겹쳐 쓴 꼴이 우스워 그냥 헛웃음만 짓고 말았다.
어차피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란 걸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으니까.


"왜 가출 따윌 한 거냐. 넌 네 해적단을 꽤 좋아하지 않았나?"
"어! 무지 좋아해. 다들 좋은 녀석들이고. 나한텐 모두 소중한 동료들이니까."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그를 빤히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실실거리며 웃는다.


"너도 그렇잖아?"
"……아아. 그렇지."


지금은 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녀석들의 존재는 이제 내게 있어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제멋대로 떠나버린 선장을 굳게 믿고 기다려준 바보 같은 녀석들.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상 옆켠에 치워두었던 항해일지가 눈에 밟혔다.
끌어당겨 읽었던 부분까지 펼쳤다.
근처에서 알짱대던 밀짚모자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뭐야, 이건? 일기? 글씨 무지 못 쓴다."
"죽고 싶… 후우. 항해일지다. 너희 배의 나미야도 쓰고 있을 텐데."
"어- 어어. 음…. 응."


모르는군.


"너도 선장이라면 가끔씩 체크해두는 게 좋을 거다."
"에이, 글자 많은 건 싫어. 아, 하지만 이건 그림이 많네. 누가 그린 거야? 왜 다 곰발바닥이야?"
"그 자국이니까."
"엉?"


밀짚모자가 이해하지 못했는지 되묻는다.
여기서 베포 이야길 꺼냈다간 또 다시 곰 타령을 하며 베포를 못살게 굴 것이 뻔하니 그냥 무시해버렸다.

일지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그간의 기록들을 읽어내렸다.
다시 종이를 넘기자 이번에는 하얀 백지가 나타났다.
이전 기록이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노트를 덮으려는데 벌어진 책장 사이로 불쑥 손이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밀짚모자를 쳐다봤다.


"오늘 것도 써야지!"
"이걸 기록하는 건 내가 아냐."
"뭐 어때."


일지를 내 손에서 빼간 밀짚모자가 깃펜을 집어들었다.
잉크병에 펜촉을 가볍게 찍어누르더니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종이 위를 휘갈기기 시작한다.
화를 낼까 하다가 어차피 찢어버리면 그만이므로 내버려두었다.

써내려가는 글씨는 괴발개발이 따로 없었다.
저런 주제에 감히 베포에게 악필이니 뭐니 지껄였던 건가.
그래도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써내려가는 모습이 그리 보기 싫지는 않아 조용히 턱을 괴었다.
하나씩 새겨지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눈으로 좇고있을 때였다.


"내가 왜 가출 같은 걸 했냐면, 트랑아."


그러고 보니 그 대답은 듣지 못했던가.
밀짚모자는 여전히 노트에 고개를 박은 채였다.


"많이 참았는데도, 역시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고."
"……."


남의 배 항해일지에 본인의 시점으로 글을 끄적이던 밀짚모자가 드디어 마지막 온점을 찍었다.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흐음. 이게 그 이유인 건가."
"어, 맞아."
"넌 정말 악필이군. 뭐라고 썼는지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어."
"엑, 그래?! 그 정도야? 그래도 난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거야 네가 썼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밀짚모자의 손에서 깃펜을 빼앗았다.
펜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책상에 기대고 선 밀짚모자를 부드럽게 뒤로 밀쳤다.


"침대로 돌아가."
"너는?"
"난 이걸 베포에게 돌려주고 오지."
"곰? 곰이 주인이야? 오, 나도 갈래!"


뒤늦게 아차 했다.
대체 저 자식은 베포에게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성가셨지만, 떼어놓는다고 떼어질 상대가 아니었다.
짧게 혀를 차며 노트를 덮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막 펼쳐진 페이지를 덮기 전, 밀짚모자가 마지막으로 새겼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보고 싶었어, 트랑아. >


하여간 성가신 녀석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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