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L

[로우루] 겨울비 정류장 03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옆에서 들려오는 콧노래는 꾸준히도 계속되었다. 로우로서는 노래를 들을 여유 따윈 없었기에 루피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고, 그만큼 발랄한 노래라는 정도만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듣기에 썩 나쁘지 않다는 것까지 함께.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길을 건너 도로 한복판에 놓인 정류장까지 가면 곧장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다. 그리 생각한 로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버스 정류장을 바라봤다.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짧은 순간 꺼멓게 빛을 잃었다.

 

  .

 

  팔을 치는 감각에 로우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 새 콧노래를 멈춘 루피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후식 먹자.”

  “?”

 

 

 

  로우는 잠시 자신이 알고 있는 후식의 의미를 되씹어보았다. 그러니까 식사를 마친 후에 입가심용으로 과일이나 간단한 다과 혹은 음료 따위를 드는 행위를 의미하는 거였지.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 후식이라는 명목 하에 김치전까지 거하게 부쳐먹은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입이 짧은 로우야 식사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불렀으나 루피 삼형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보가 전 하나를 부칠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던 에이스와 루피를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완전히 질린 얼굴로 바라보던 로우를 의아하게 바라보기까지 했다. 먹지 않고 무엇 하냐는 눈빛으로.

 

  그 사이에서 어떻게 멀뚱히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로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젓가락을 들었고, 개미가 먹이를 떼어내듯 야금야금 집어먹다가 끝내 루피가 쑤셔 넣은 큼직한 김치전 조각을 삼키고서 거의 구토 직전까지 갔다. 하얗게 질린 로우의 얼굴을 보고도 루피는 그저 많이 먹으라며 생글생글 웃어댔다. 그걸 생각하니 로우는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후식이라니, 헛소리 하지 마.”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러지 말고 편의점 잠깐 들렀다 가자. 내가 사줄게.”

  “됐어. 난 그냥 갈 테니, 너 혼자 가라.”

 

 

 

  때마침 신호등의 불빛이 푸른 색으로 바뀌었다. 하얀 줄이 그어진 횡단보도 위로 막 발을 내딛던 찰나였다. 로우의 팔을 붙잡은 루피가 순식간에 그를 본인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같이 가자. 혼자 먹으면 심심하단 말이야.”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니까.”

  “그럼 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 돼? ? 로우.”

 

 

 

  그 말이 로우에겐 꼭 어린 아이가 칭얼대는 모양새로 들렸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그를 빤히 응시한다. 왠지 모르게 단호히 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멈춰있던 자동차 소리가 도로 위를 가로질렀다. 이미 신호등의 불빛이 도로 붉게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그럼 간단한 걸로 때워.”

  “!”

 

 

 

  몇 초 가량을 더 고민하다 한숨을 쉬듯 승낙하니 루피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회복된 그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로우를 잡아 끌었다.

 

  노래는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가사가 없는 허밍에 불과했지만 완전히 느낌이 다른 곡이었기에 로우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까의 것이 단순히 기분이 좋아 마구 튀어만 대는 노래였다면 지금은 좀 더 세심하게 굴곡이 진 노래였다. 그리고 로우가 듣기에는 지금의 곡이 더 마음에 들었고.

 

  억지로 끌려오느라 약간 상해있던 기분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걷는 루피의 얼굴을 힐끔거렸다가 땅 아래로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파란 선이 그어진 루피의 운동화가 성큼성큼 보도블록을 밟고 있는 게 보였다.

 

 

 

  “, 그 땐 왜 그렇게 얇게 입었던 거야?”

 

 

 

  편의점이 가까워졌는지 걸음걸이를 늦춘 루피가 대뜸 그리 말했다. 로우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루피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이렇게 두껍게 입었으면서. 역시 넌 추위를 많이 타는 거 맞지?”

  “…….”

 

 

 

  별 달리 의미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갑자기 그 날의 기억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였고, 그걸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내뱉은 거겠지. 긴 시간을 함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루피의 성격에 대해 그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야 루피는 딱히 로우처럼 본인을 꽁꽁 싸매는 타입도 아니었으니까. 외양이든, 성격이든 말이다.

 

  로우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팔을 비틀어 루피의 손에서 벗어났다. 팔을 죄이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편의점이면 되는 거지. 아니면 그 외에 따로 원하는 곳이 있나?”

  “아니. 저기면 돼.”

 

 

 

  루피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우는 바로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서 오라는 진부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볼일이 있는 건 그 자신이 아니었기에 로우는 옆으로 물러선 채 루피를 기다려주었다.

 

  금방 로우를 따라 들어온 루피는 신이 나서는 편의점 코너 곳곳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분명히 간단하게 때우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저렇게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거지.

 

 

 

  “잠깐.”

 

 

 

  품에 한 가득 군것질거리를 끌어안은 루피가 카운터로 다가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해맑게 웃는 얼굴로 작은 의문을 띄운 채 로우를 바라본다. 로우는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그게 다 뭐냐.”

  “후식!”

  “…….”

  “……?”

 

 

 

  , 빡쳐.

 

  순간 본인도 모르게 그리 생각한 로우는 화들짝 놀라 급히 떠오른 말을 지워버렸다. 분명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떠들어대던 것을 몇 번 들었을 뿐이고, 본인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이렇게 진심을 쏟아 부어 떠올리다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 너도 먹고 싶어?”

  “……그걸 다 먹으려고?”

  “.”

  “이 자리에서?”

  “에이, 무슨 소리야.”

 

 

 

  루피가 가당찮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로우는 다소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지. 아마 집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놀이터 가서 먹을 거야.”

  “…….”

  “전부.”

  “…….”

 

 

 

  함박웃음을 지은 루피가 끌어안고 있던 과자들을 모조리 카운터에 쏟아 부었다. 와르르 들려오는 소리에 로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 진짜 빡친다.

 

 

 

 

 

 

 

 

  *

 

  정자에 앉은 루피는 정말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조로가 이번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길을 잃었다느니, 상디의 도시락을 몰래 꺼내 먹었다가 등을 걷어 차였다느니. 전부 로우가 알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는 루피의 둥둥 떠 있는 기분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다.

 

  뜯어놓은 과자 봉지에서 납작한 모양의 스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물자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방 바스러진다. 짭조름한 맛이 혀 위로 가득 퍼졌다.

 

 

 

  “그리고 네가 전화를 건 거야! 으히힛, 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 여기 동네에는 아는 사람이 없거든. 그래서 무지 반가웠어.”

  “난 이 동네 사람이 아닌데.”

  “어쨌든 여기까지 와줬잖아.”

 

 

 

  다시 와줄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는데.

 

  굳이 그리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들떠있는 루피의 기분을 망치는 게 싫었을 뿐더러, 슬슬 몸을 타고 올라오는 추위에 입을 여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이러고 앉은 지 얼마나 지났더라…….

 

 

 

  “……!”

 

 

 

  불현듯 깨달은 감각에 흠칫 놀란 로우가 자리에서 두 눈을 크게 부풀렸다. 그의 변화를 알아차린 루피가 막 입 안에 과자를 밀어 넣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시간. 지금 몇 시지?”

 

 

 

  루피가 뒤집어뒀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버튼을 누르자 넓은 화면 한 가득 조명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 삼형제의 사진 위로 큼직하게 박혀있는 현재의 시각.

 

 

 

  “.”

  “……? 왜 그래?”

 

 

 

  당황한 로우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들고 있던 과자를 마저 입에 문 루피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 화장실 급해?”

  “돌아가야 돼. 젠장, 시간이 이렇게 늦었을 줄이야. 분명 돌아왔을 텐데……!”

  “뭐가?”

  “…… 알 거 없어.”

 

 

 

  정신이 없어 하마터면 고스란히 대답해버릴 뻔했다. 빠르게 말을 끊어버린 로우는 그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리려 했다. 그러나 공원의 펜스 너머로 걸어오는 장신의 인영을 발견한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꽝꽝 얼어버렸다. 눈빛이 시퍼렇게 질리는가 싶더니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 로우?”

  “, 돌아가.”

  “?”

  “. 집으로 가라고. 당장.”

 

 

 

  시선은 걸어오는 남자에게 고정시킨 채 손만 뻗어 루피를 밀어냈다. 그러나 애초에 눈치는 밥 말아먹은 루피가 꺼멓게 타들어가는 로우의 속내를 알아줄 리가 만무했다. 어깨를 꾹꾹 밀어대는 로우의 손을 쳐낸 루피가 불만스레 투덜댔다.

 

 

 

  “왜 그러는 거야. 아직 과자도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나중에 다시 사줄 테니까 당장 꺼지라고!”

  “싫다니까! 먹을 거 남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급해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루피의 고집에 로우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다 먹으면 되잖아!”

  “?! ! 너 혼자 이걸 다 먹겠다고?!”

  “이 멍청한 새끼가!”

  “뭐야?! , ……! 팬더 자식아!”

  “…….”

 

 

 

  아니, 진짜 뭐라는 거야.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는 루피의 엉뚱한 소리에 로우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본인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조차 깜박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 사이 저만치서 걸어오던 남자가 어느덧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섰다. 그 기척을 알아차린 로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기에 있었나.”

  “?”

 

 

 

  루피가 또 멍청한 반응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보이는 건 정체 모를 한 남성의 가슴팍뿐이었다. 고개를 꽤 들어올리자 그제야 그들 곁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누구?”

  “흐음. 이건 또 뭐지.”

 

 

 

  까만 선글라스 때문에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살짝 돌아간 고개 덕에 선글라스 위로 골이 나있는 루피의 얼굴이 얼핏 비쳤다.

 

 

 

  “넌 뭐냐.”

  “뭐야. 아저씬 뭔데!”

  “상당히 버릇없는 꼬마로군.”

 

 

 

  팔짱을 끼고 선 남자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여태껏 굳어만 있던 로우가 재빨리 움직여 루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잠시 산책 나온 것뿐이야. 이제 돌아가려고 했어. 이건…….”

 

 

 

  로우의 눈이 루피를 힐끔거렸다.

 

 

 

  “모르는 녀석이야. 이 근처 주민이겠지. 괜히 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고.”

  “뭐야! 너 우리 집까지 와서 밥까지 먹은 주제에!”

 

 

 

  , 썩을 놈이……!

 

 

 

  “흐음.”

  “잠깐만. 베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잘 알겠는데-”

  “‘.”

 

 

 

  베르고라 불린 남자의 주먹이 다짜고짜 로우의 뺨을 강타했다. 억눌린 신음과 함께 뒤로 밀려난 로우가 정자 위로 넘어졌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건지 얼굴을 굳힌 루피가 두 눈을 부릅떴다.

 

 

 

  “로우!”

  “통성명까지 마쳤나. 상당히 친한 모양인데.”

  “당신 뭐야! 뭔데 내 친구를 때리는 건데!”

  “친구라.”

  “, 아니, 아냐!”

 

 

 

  부어 오른 뺨을 감싸지도 않고서 일어선 로우가 다시 루피의 앞을 막아 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루피 쪽에서 그를 밀쳐버렸다.

 

 

 

  “너 왜 자꾸 내 앞을 막는 거야! 맞았잖아, !”

  “너야말로 눈치 좀 차려! 지금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아까 꺼지랄 때 꺼졌어야지, 이 멍청한 자식아!”

  “어른을 앞에 두고 싸우다니. 한심한 녀석들. 예의라곤 쥐뿔만큼도 모르는군.”

 

 

 

  으르렁대는 듯한 낮은 중얼거림에 로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발을 뻗어 루피의 다리를 걸어버린 뒤 정자 위로 넘어뜨렸다. 짧은 비명소리가 울렸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도피가 돌아온 거지. 내 불찰이야. 미안해. 금방 돌아가려고 했어.”

  “금방 돌아오려던 녀석이 이런 먼 곳까지 오셨나.”

  “그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생각이라.”

 

 

 

  베르고의 커다란 손이 로우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 막힌 소리를 뱉으며 입을 악문 로우는 베르고가 내던지는 대로 나가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짚은 손이 그대로 모래알맹이에 쓸려 화끈거렸다.

 

  로우를 치워버린 베르고는 뚜벅뚜벅 루피에게 다가갔다. 정자 위로 넘어질 때 어딜 잘못 부딪쳤는지 끙끙대던 루피가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올렸다. 무표정의 베르고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루피의 눈 속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개자식!”

 

 

 

  언제 앓고 있었냐는 듯 단숨에 일어선 루피가 베르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워낙에 체격 차가 컸던 탓일까. 베르고는 옆으로 몸을 살짝 피하며 단숨에 루피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 !!!”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 덤빌 자리를 보고 덤벼야지.”

  “베르고!”

 

 

 

  고함에 가까운 부름에 베르고의 이마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다. 거칠게 루피를 내팽개친 베르고는 땅에 쓰러져있는 로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들어올려진 커다란 발이 그대로 로우의 복부를 걷어찼다.

 

 

 

  “…….”

  “거 봐라. 싸가지가 옮았잖나. ‘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는 거지.”

  “, ……. 베르고, ……. 그만 해. 그 녀석은 아무 잘못도 없어. 여기까지 나온 내 잘못이 더 크니까, 그러니까…….”

 

 

 

  얻어맞은 부위가 욱신거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래도 기어코 참아가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거의 비는 것에 가까운 로우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베르고는 쯧, 혀를 찼다.

 

 

 

  “돌아가지.”

  “.”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땅을 짚은 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몸까지 휘청거렸다. 그 꼴을 그저 빤히 지켜만 보던 베르고는 로우가 똑바로 몸을 세우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그가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울리는 구두소리를 따라 로우 또한 걸음을 옮겼다. 비척비척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 했을 때,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로우는 베르고의 기미를 살피고서 잠시 뒤를 돌아봤다.

 

 

 

  “로우.”

  “…….”

 

 

 

  그 새 루피의 목에 푸르스름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마 그의 형들이 보면 또 노발대발 난리를 치겠지.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누었던 통화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과자는…… 그냥 네 형제들이랑 먹어라.”

  “너 설마 나 때문에 맞은 거야? 내가 괜히 같이 과자 먹자고 졸라서?”

  “이제야 눈치가 좀 생겼나.”

 

 

 

  웃음기 섞인 로우의 대답에 루피가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안함이 덕지덕지 묻은 꼬락서니가 참 볼만 했다.

 

 

 

  “아니야.”

  “……어어?”

  “장난이라고. 너 때문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이건 그냥…… 내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니까.”

 

 

 

  맞아, 그랬지. 이게 내 일상이었지.

 

  아직 핏기가 남아있는 입 안이 씁쓰름했다. 루피의 분위기에 휩쓸려 잠시 잊고 있었다. 로우의 삶은 원래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무튼 돌아가라. , 그래. 너희들 말인데, 너무 많이 먹어. 그것도 그다지 건강에 좋진 않으니 조절 좀 하고.”

  “나 별로 많이 안 먹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또 웃음이 나왔다. 이제 슬슬 베르고의 뒤를 따라야 하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에 제 친구를 때렸다며 노발대발하던 루피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로우에게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대던 모습도. 무슨 소리인지는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꽤 재밌었는데…….

 

 

 

  “로우, 우리 다음에 또 놀자. 다음엔 과자 먹자고 붙잡지 않을게.”

  “…….”

  “로우.”

 

 

 

  로우는 조용히 루피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 베르고의 뒤를 쫓았다.

 

 

 

  “로우, 다음에는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때 우리 만났던 정류장으로 가면 되지? ?”

  “…….”

  “아무튼 갈게! 또 보자!”

 

 

 

  루피는 팔을 흔들며 열심히 인사했다. 그래봤자 그를 등진 로우의 눈에 그 인사가 보일 턱이 없었다. 그래도 허공에 붕붕대는 소리는 고스란히 들려왔기에 로우는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끝내 이를 악물었다.

 

  뭐가 이렇게 아쉽고 억울한지 모르겠다. 바로 등 뒤에 있는 신선한 즐거움을 버려둔 채 다시 진창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게 이토록이나 사람 속을 엉망으로 헤집어놓는 독이 될 수 있었던가. 그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빌린 옷 따위야 그냥 우편으로 부쳐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을.

 

 

 

  “표정 한 번 볼만하군.”

  “…….”

  “포기해라. 네가 섞이는 순간, 저 녀석의 삶도 똑같이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알고…… 있어.”

 

 

 

  억눌린 대답을 뱉으며 로우는 힘 없이 걸었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아주 고역이었다. 귓가에는 아직도 루피의 발랄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 -래서 무지 반가웠어. ]

  [ 로우, 우리 다음에 또 놀자. ]

  [ 그 때 우리 만났던 정류장으로 가면 되지? ? ]

 

 

 

  짧았던 즐거움을 뒤로 하고, 로우는 무거운 발을 하염없이 움직였다. 신발 바닥이 진흙에 들러붙은 듯 온통 찐득거리는 기분이었다.

 

 

 

  [ 로우. ]

  “로우, 걸음이 늦잖아.”

  [ 또 보자! ]

  “…….”

 

 

 

  그래. 찰나의 일탈이었다고 생각하자. 살면서 한 번쯤은 그래봐도 되는 거잖아. 너는 내게 짧았지만 달콤한 휴식이었고, 이제 나는 다시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그게 설령 죽어도 원치 않는 역겨운 진창 속이라 할 지라도.

 

 

 

 





'B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우루] 내 해적선엔 무슨 일이지 밀짚모자야  (5) 2014.06.01
[로우루] 겨울비 정류장 02  (2) 2014.04.10
[로우루] 겨울비 정류장 01  (3) 2014.01.12
[로우루] 느와르 01  (5) 2013.10.12
[로우루] 치료  (0) 201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