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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로줍썰(完)

로줍썰 조각글 - 후일담





나부끼는 눈발 사이로 새하얀 증기가 실오라기처럼 파고든다.
하얀 접시에는 영롱한 빛깔의 수프가 달큰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레이디, 막 내온 따뜻한 수프입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맛보시길."


상디가 한껏 부드러운 어조와 함께 허리를 굽혔다.
이내 뻗어온 손 하나가 그의 접시를 받아들었다.


"잘 먹도록 하지."
"네 놈한테 갖다바친 수프가 아니야!!!"
"아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찬 공기를 누그러뜨렸다.
로우를 향해 매섭게 돌변했던 상디의 얼굴 또한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정중하게 인사까지 마친 상디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로우를 노려본 뒤 돌아섰다.
그를 찾는 루피 쪽으로 뻗어가는 길쭉한 다리.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주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
"로우는 안 먹어요?"


여주의 입술이 어느 새 다가온 스푼을 조심스레 머금었다.
수프는 알맞게 식어 있었다.
고기의 육즙이 어우러진 수프는 생애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진미였다.
혀끝에서 퍼지는 황홀함을 한껏 음미하던 여주는 입 안의 액체를 목 너머로 흘려보냄과 동시에 감탄했다.


"와,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쯧."


혀를 찬 로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하기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금세 숨이 꺼질 듯 위태로웠던 그녀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지 당장 승천할 것 같다는 둥 혹시 이미 천국 아니냐는 둥 여전히 로우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만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로우의 눈이 아직 발그레한 여주의 뺨에 머물렀다.
벌어졌던 입술은 도로 다물리며 소리 없이 한숨만 삼켰다.
스푼을 내려둔 손이 여주의 이마에 닿았다.


"아직 미열이 남았군."
"괜찮아요! 이거 다 먹으면 전부 나을 거 같아요!"
"……후우."


여주는 벌써 다음 한 스푼을 기다리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로우가 어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눌러삼킨 그는 제 품에 안긴 여주의 담요를 좀 더 단단히 여며주었다.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그의 긴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로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지극정성이군."


옆에 앉아있는 스모커가 중얼거렸다.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였다.
물론 로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신기하다는 듯 스모커를 쳐다보는 여주의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슬쩍 돌려놓을 뿐이었다.


"아 잠깐만요. 나 스모커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


로우의 손을 끌어내리는 여주의 입술에 다시 스푼이 물렸다.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그녀는 온순한 얼굴로 돌아가 얌전히 수프를 삼켰다.


"하, 겁나 맛있다."
"넌 이쪽 사람이 아니군."
"쿨럭쿨럭……!"


다시 한 입 수프를 받아먹던 여주는 돌연 사레에 들려야만 했다.
원인제공을 한 스모커는 아랑곳않은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로우, 내 얘기 했어요?"
"그럴 리가. 나도 궁금하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스모커를 향했다.
정작 본인은 평소처럼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민간인을 구분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에이, 그런 의미였이요? 난 또……."
"……?"
"민간인 맞아요.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는, 어……."


열심히 수프를 받아먹던 여주가 느닷없이 말을 멈추고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 그녀의 두 눈에 스친 그늘을 예리한 두 남자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지적하려던 찰나, 여주가 한 발 먼저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안 나네."
"……."
"너……."
"헐 벌써 다 먹었어. 한 그릇 더 받아올게요!"


로우의 손에서 빈 접시를 낚아챈 여주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로우는 애먼 주먹만 꾹 말아 쥐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한 없이 달콤한 눈빛으로 그와 눈을 맞추다가도 이따금씩 흐린 눈을 하고서 시선을 떨구고는 했으니까.
무엇이 문제인지 몇 번이나 캐묻고 싶었으나 참아야만 했다.
어쩐지 로우 또한 무척이나 두려운 느낌이 들었기에.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여주에게나 로우에게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눈을 할 줄 안다니, 정말 의외군 그래."
"……저 애는 특별하니까."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 끝엔 상디의 옆에서 말갛게 웃고 있는 여주가 있었다.
물론 여주의 손은 상디의 손에 아주 정중히 붙들려있었다.


"아름다운 레이디, 후식은 어떤 걸로-"
"녹차면 된다."
"또 트랑이 네 놈이냐!"


어느 새 여주는 로우의 품 속에 안겨있었고, 대신 상디의 손 안엔 휘어진 스푼만이 남아있었다.
식기를 망가뜨렸다며 노발대발하는 상디를 뒤로 한 로우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휘둘렀다.
동시에 여주의 손에는 반듯한 스푼 하나가 생겨났다.
눈 깜박할 사이 사라져버린 스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해군 하나를 모르는 채로, 그녀는 다시 수프를 한 모금 머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

여주에게 전보벌레는 마냥 신기했다.
통화를 하는 대상이 도플라밍고였던가.
기억을 곱씹던 그녀는 전보벌레가 홉뜬 눈을 하고서 주절대는 모양새를 빤히 바라봤다.
도플라밍고에게 '거래 조건'을 내거는 로우는 막힘 없이 정확하고 빠르게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거의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기에 전보벌레는 슬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기사가 없으면 교섭은 결렬이다."
-잠깐, 로…….


매몰차게 통화가 끊겨버린 전보벌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마 지금쯤 도플라밍고는 노발대발 펄쩍 뛰고 있을 테다.
저 전화를 받고 뒤늦게 펑크해저드에 갔다가 애먼 스모커만 쥐 잡듯이 잡는 전개였던가.

도플라밍고의 실에 당해 피를 흘리던 스모커가 떠올랐다.
물론 아오키지가 등장해 구해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든 여주는 금세 로우와 눈이 마주쳤다.
여주의 기분을 단번에 읽어낸 로우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큼직한 손이 보드라운 머리결을 쓸어내렸다.
이마 위에 살며시 와 닿는 입맞춤의 감촉을 느끼며 여주는 눈을 감았다.


"괜찮아. 전부 잘 될 거다."
"알아요, 로우가 하는 일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시 뜬 눈에는 잔잔히 미소 짓는 로우의 얼굴이 보였다.
여주는 가슴께에 무언가가 기분 좋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저 또한 그를 따라 웃었다.


"쟤들은 정말 사이가 좋구나."
"바보야, 둘은 애인 사이라는 거야."
"어엉, 애민 사이. 들어봤어."


못 들어본 게 분명한 루피의 대꾸에 나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만면 가득 떠올렸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 말이야. 물론 너는 이런 거 관심도 없겠지만."
"아하, 그럼 둘이 결혼해?"
"그야 뭐……."


트랑이의 지금 모습으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뒷말을 그대로 삼킨 나미는 루피에게서 눈을 돌려 여주와 로우 쪽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 '죽음의 외과의'에게서 저리도 따스한 얼굴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온 세상의 달달한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두 눈빛에 담아낸 것만 같았다.
그 어떤 디저트도 여주를 보는 로우의 시선보다 달콤할 순 없을 터다.
그건 로우를 바라보는 여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보는 이도 이렇게 온화한 기분이 드는 거겠지.
대체 누가 저 둘의 사이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애심 넘치는 나미의 미소는 불쑥 끼어든 목소리 하나에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다.


"야, 너희들 결혼해?"
"므, 뭐?!"


루피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여주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로우는 좋았던 분위기를 단번에 말아먹은 루피를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 루피. 파도가 높아. 일하러 가자."


써니 호의 항해사는 동맹 해적의 눈빛에 타죽을 뻔한 선장을 냉큼 구해냈다.
영문도 모르는 루피는 그저 나미의 손에 뒷덜미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나갔다.
벌겋게 익은 여주는 슬그머니 로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니 후다닥 고개를 숙여버린다.
로우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러지? 갑자기 눈을 피하고."
"아, 아이고, 배가 겁나 흔들리네. 나도 도와주러 가야겠다."


로우의 품에서 벗어난 여주는 잽싸게 갑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소리 죽여 웃던 로우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곧은 입매가 벌어지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지, 결혼……."


이내 씁쓸한 웃음이 벌어진 입술 틈새를 메웠다.


"당신이 들으면 기뻐서 날뛸 말이 아닌가? 코라 씨."


그가 버릇처럼 내쉬는 한숨과도 무척이나 닮아있는 웃음이었다.








*

이전에 로우가 들려줬던 적이 있다.
달빛이 닿지 않는 밤바다는 그야말로 새카만 어둠에 가깝다고.
여주는 이제야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달빛이 번져있는 자리는 무수히 반짝이면서도 바로 곁의 그늘진 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여있었다.
그 고요한 경계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바다를 감상하던 여주는 뺨을 간지럽히는 올곧은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당연하게도 로우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긴 팔이 여주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이끄는 손길에 얌전히 응하자 단단한 품이 그녀를 반겼다.


"로우, 안 피곤해요? 눈 좀 붙여요."
"너야말로. 몸은 괜찮나?"
"멀쩡해진 지가 언젠데요. 자, 빨리 자요. 내가 옆에 있어줄게요."


마치 큰 은혜를 베푸는 양 으스대는 여주의 행동에 로우는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자고 싶지 않아."
"그러다 피곤해서 일에 차질생기면 어쩌려구요."
"눈을 감으면…… 네가 사라질 것 같다. 그게 두려워."


이번에는 여주가 숨을 멈추었다.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앙물던 그녀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로우의 어깨에 머리를 부볐다.
여린 두 팔이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럴 리가요.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 내가 또 떠날 리가 없잖아……."
"아, 그거 말인데."
"으아ㅏ아앙ㅇ아ㅏㅏ악!!!"


불쑥 튀어나온 낯선 목소리에 여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도 모르게 로우의 품 속을 파고들자 로우 또한 반사적으로 그녀를 보호하듯 감쌌다.
어느 틈엔가 써니 호 전체를 뒤덮는 룸이 생겨나있었다.


"어이쿠, 여전히 리액션은 죽이네."
"넌……!"


로우는 검집에서 꺼낸 긴 검날을 배의 난간에 매달린 인영에게 겨누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동공이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여주는 쿵쾅거리는 로우의 심박을 느끼며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귀까지 덮는 남색 방울 모자를 쓴 남자였다.
비록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모자에 쓰인 영문자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페, 펭귄?!"
"안녕, 오랜만. 오랜만입니다, 캡틴?"
"……!! 웃기지 마, 이 개자식!!"


여주를 등 뒤로 밀어넣은 로우가 펭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난간을 뛰어올라 검을 피한 그는 사뿐히 갑판 위에 착지했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는 움직임은 마치 유령처럼 느껴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로우! 동료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펭귄은 다른 녀석들과 함께 조우에 있어. 이런 곳에 혼자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저건 뭔데...?
누가 봐도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던 여주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있어 펭귄은 초면일 터였다.
그런데도 마치 익히 알고 있는 지인을 만난 듯한 이 느낌은...


"으음. 역시 이쪽 얼굴이 더 좋은가?"


하얀 손가락이 모자를 벗어 던졌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여주가 경악함과 동시에 검을 쥔 로우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그딴 짓은 집어 치우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을 텐데."
"응, 그래서 이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거야."
"사장님!!"
"안녕, 잘 지냈어? 물론 아닌 거 알고 물어보는 거야."


여주에겐 익숙한 사장님의 얼굴을 하고 선 남자가 방싯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웃음을 보며 여주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꼬물거리며 로우의 등 뒤를 벗어났다.
로우는 못마땅한듯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으나 그녀가 자신의 옆에 서는 것까지는 내버려두었다.


"그…… 오랜만이에요. 혹시 제가 여기에 온 건……?"
"내가 저번에 선물 줬잖아. 입술에 키슿─"


남자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다란 검날의 그의 입을 꿰뚫었다.
물론 검이 지나간 자리에선 하얀 빛만이 새어나올 뿐, 피 한 방울 비치지도 않았다.


"……이 배은망덕한 해적놈이."
"그 입을 찢어줘야 은혜란 걸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만."
"잊었나본데, 여긴 내 세계야."
"그럼 그 재수 없는 몰골도 이 세계의 것으로 바꾸시지 그래."
"허허."


두 남자의 이마에 슬슬 핏대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여주는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로우의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자를 주워와 남자에게 씌웠다.
그녀 자신이야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만, 로우가 저리도 질색을 하니 굳이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내심 도발을 원하는 듯했으나 순순히 여주의 뜻에 따라주었다.
마치 내가 이 정도의 아량을 베푸노라며 한껏 뻗대는 표정에 로우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결국 그 또한 여주의 다독거림으로 풀어주어야만 했다.


"철 좀 들어요, 둘 다."
"……."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느낌이 많이 새롭네."
"뭐가요?"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튕기자 놀랍게도 갑판 위에 간소한 티 테이블이 나타났다.
남자가 먼저 의자를 빼어 앉고, 뒤이어 여주와 로우 또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느닷없이 마련된 자리치곤 꽤나 어색함이 없었다.
어쩌면 여주와 로우 둘 다 이러한 만남에 이미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음, 일단 얘가 교통사고로 빈사상태에 이른 건 알고 있─"
"으아아ㅏㅇㅇㅇ아ㅏ아아ㅏ!!!!!!!!"


갑작스런 남자의 발언에 화들짝 놀란 여주가 굉음을 지르며 테이블을 뒤엎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테이블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자는 다시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로 환히 웃었다.


"둘이 아주 닮아가네?"
"교통사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앉아있던 로우가 굳은 얼굴로 여주를 바라봤다.
여주는 그녀대로 딱딱하게 굳어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아니, 그게……. 하하……. 이, 이 양반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숨겨서 미안해요……. 그게, 좋은 일도 아니구 괜히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


로우의 시선이 더욱 매서워졌다.
여주는 진땀을 흘리며 애써 눈을 피했다.
앞에서 투덜거리며 테이블을 바로 세우는 남자를 간간히 노려봐주며.


"남자가 째째하게 그런 거로 여자 친구 노려보는 거 아냐. 나한테 들으면 되는 거잖아?"
"그것도 뚫린 입이라고 잘도 떠드는군."
"그럼. 저 애를 덮친 건 화물트럭이었고, 원래대로라면 저 앤 그 자리에서 즉사였어."
"네?!"
"……."


로우의 눈동자에 섬찟한 안광이 번뜩였다.
피부에 와닿는 살기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충분히 놀란 여주였으나 본능적으로 로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화를 삭이듯 힘주어 잡자 벌어졌던 로우의 동공이 다시 수축되었다.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감정을 갈무리한 그는 이전보다 더 찌를 듯한 시선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그 말은 마치 뭔가 달라진 게 있어서 이 녀석이 죽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아. 죽지 않았어. 가사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자, 잠깐만요!! 지금 둘 다 엄청 무서운 소리들 하고 있는 거 알아요?! 내가 그 당사자거든요?"
"뭐 어때. 안 죽었으면 됐잖아?"
"엌……."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 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여주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급히 로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녀의 SOS에 로우는 가벼이 숨을 뱉었다.
찰나였지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려앉은 심장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박동했다.



"자세히 설명해.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 내색도 않고서 남자를 닦달한다.
여주는 거기에 동의하듯 눈에 불을 켜고서 남자를 직시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는 실소를 하며 의자 등받이에 깊이 기대었다.


"둘이 참 잘 어울려, 응?"
"흫ㅎㅎ…흠흠. 빨리 말해주세요. 대체 무슨 뜻이에요?"


새어나온 흐뭇함를 급히 감추고서 태연한 척 하지만 턱도 없다.
그녀는 제 연인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뭐가 문제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그녀의 연인 또한 남자의 눈엔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이긴 했지만.

잠시 침묵한 남자는 다시 입을 뗐다.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에게 한시라도 빨리 모든 걸 설명해야만 했다.


"그 때의 내 입맞춤─검에서 힘 빼는 게 좋을 걸? 아무튼 그건 이 애에게 내 가호를 입힌 거였어. 말했잖아, 선물이라고. 내겐 보였거든. 그러니까, 네 운명이."
"헐? 그럼 그걸 진작 말해줬어야죠!"
"말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세상의 모든 건널목을 건너지 않기라도 할 셈이야?"
"으……."


남자의 신랄한 물음에 여주는 입을 다물었다.
로우처럼 그 또한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또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건 것은 '영혼의 보호'. 그래서 네 혼이 이곳으로 오게 된 거지. 네 몸은 혼을 담아두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거든."
"……."
"내 힘이 남아있는 육신은 조금씩 상태가 호전될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 때까지 네 혼을 보호해줄 세계가 필요한데, 그게 리스크가 좀 크거든? 네 세계의 그 녀석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해줄 리가 없고. 그래서 유능한 내가 널 맡아주기로 한 거야. 고맙지?"
"어, 음, 네. 네……."
"쥐뿔도 이해 못했구나?"
"……."


부가 설명은 그쪽에 있는 버르장머리께서 맡아주시겠지.
간단한 한 마디와 함께 로우를 본다.
여주 또한 고개를 홱 틀어 로우를 올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된 로우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가 본래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이 녀석이 이곳에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겠군?"
"잠깐만요. 나 아직 이해 못 했어요!"
"정확히 얼마나 남았지?"
"아, 로우!!"


여주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 지 로우는 팔짱을 낀 채 남자에게 물었다.
웃음을 터뜨린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시간의 흐름도 다르고, 뭣보다 이제 더 이상 난 그 세계에 간섭할 수가 없거든. 몰라."
"어쩐지 도움이 된다 싶었다."
"뭐, 느낄 수 있지 않겠어? 본인의 육신이니."
"뭔 소리에요?"


안타깝게도 여주의 목소리는 이제 남자에게마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분통을 터뜨리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우 또한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여주를 잡아 일으켰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뜨자 테이블 세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자, 여기까지야. 이제 정말 다시는 볼일 없을 거야."
"그거 참 반가운 소리군. 꺼져라."
"하하, 배은망덕한 놈."


남자는 여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모두의 무시 속에 뾰로통해진 그녀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그래도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어쨌든 날 도와준 거죠? 내가 이렇게 다시 로우를 만난 건 전부 당신 덕분이잖아요. 그쵸?"
"역시 넌 마음에 들어. 괜히 또 미안하네. 이런 성질 더러운 놈이랑 엮이게 만들어서."
"그게 가장 감사한데요."


배시시 웃은 여주는 로우의 손에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그 손길을 마주잡은 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지. 전부 네 무능력에서 빚어진 일이기는 하다만."
"넌 정말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이미 늦었어. 너, 이딴 놈 버리고 빨리 네 세계로 돌아가버려."


까르륵 맑은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동시에 하얀 빛이 갑판 위에 번쩍였고, 이내 사라졌다.
여주와 로우의 앞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양 차가운 바닷바람만 맴돌았다.
더불어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파도 소리도 숨결이 터지듯 와르르 쏟아져들어왔다.


"그래서 뭔 내용이었어요? 내 혼이 어쨌다고요?"
"시간이 늦었어. 피곤해. 이만 눈이나 붙이지."
"아 좀, 로우!"


로우는 여주의 손을 이끌었다.
투덜대면서도 얌전히 끌려가자 발그레한 입술 위에 따스한 온기가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아까 밀짚모자야가 말했던 것 말이다."
"응?"


로우가 속살거릴 때마다 그의 숨결이 입술 위를 간지럽혔다.
그와 이마를 맞댄 여주는 시야 가득 보이는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맹수의 것처럼 서늘하면서도 달빛이 배인 듯 영롱히 반짝인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홀린 듯 로우와 눈을 맞추던 여주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루피요?"
"그래."
"뭐라고 했더라……."


몽롱해진 머릿속이 느릿느릿 기억을 되짚었다.
정신없던 하루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찬찬히 거슬러올라갈 쯤이었다.
로우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싼 여주의 손 아래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끝이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퍼졌다.

잔웃음을 터뜨리며 로우의 손에 깍지를 끼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약지에 무언가 단단한 물체가 끼워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이 손가락 밑둥에 안정적으로 착 달라붙었을 때, 비로소 여주는 화들짝 놀라 로우에게서 떨어졌다.


"어, 어……."
"결혼……까지 바라진 않아. 하지만 그걸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다."


매끈한 곡선을 자랑하는 금빛 링이었다.
그 중앙에 박힌 옅은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눈 부시게 빛났다.
여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목이 메여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었다.
물기가 그렁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별빛이 담겨 은은히 일렁였다.
세상에 더 없이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이.

로우는 그의 눈 앞에 있는 또 하나의 보석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눈꺼풀이 감기며 짭짜름한 물기가 입술 틈새로 흘러들어왔다.


"받아주겠나?"
"……건데요."
"응?"


꽉 잠긴 목소리라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로우는 본능적으로 여주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다 본인을 밀치는 힘에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두 눈을 글썽이는 여주가 똑바로 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 속에서 어딘지 노기가 느껴졌다.

로우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뭔가 실수한 게 있던가? 분위기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하지만 시저 녀석이 가장 아끼던 보석 중 하나였는데.
억지로 강탈하느라 팔자에도 없는 해적선 소탕까지 도맡아 처리해줬다.
보자마자 여주가 떠오른 반지였으니까.
보석의 세공이며 빛깔까지 전부, 모조리 여주를 빼닮은 반지였으니까.


"그게, 그 반지는─"
"결혼할 건데요?!"


씩씩거리던 여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요한 밤바다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잔뜩 당황한 로우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아보려 했으나 여주가 마구 도리질치는 바람에 허탕으로 돌아갔다.


"반지만 주고 결혼은 안 하겠다구요?! 그딴 게 어딨어! 반지를 줬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 아니, 내 말은, 넌 결국 원래 세계로 돌아갈 테고 그렇게 되면 결혼이니 뭐니 하는 건 네 미래를 구속해버리는 꼴이 되니까─"
"뭔 헛소리야!!! 난 이미 끝났거든요! 로우가 돌아가버리고난 뒤로 아무 남자도 못 만났거든요!! 이젠 아무도 내 성에 안 차거든요?! 나 죽어도 로우 못 잊거든요!!!"


영화관에 존잘 남자 배우가 나와도 오징어로 보이는 어마무시한 저주에 걸려봤어요?!
난 이미 걸렸어! 내 눈은 끝났다고!
완전 착하고 자상한 남자가 나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1도 안 설레요!
왜냐면 로우가 들려주던 고백에 비하면 나한테 그건 아무 설렘도 없는 토익 LC 방송에 불과하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속사포로 질러대는 통에 로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여주를 진정시키고 싶었으나 그녀의 이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래였다.
어느 새 로우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던 여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결혼할 거예요, 말 거예요?!"
"하, 할게."
"진짜로?"
"그래. 그러니까 진정해."


미친듯이 흔들리는 로우의 동공을 매섭게 노려보기를 몇 여 분.
슬슬 흥분이 가라앉은 여주가 뒤늦게 흠칫하며 로우의 멱살에서 손을 뗐다.
구겨진 옷깃을 펴주는 손길이 다소 뻣뻣했다.
쩌렁쩌렁 요동치던 공기는 놀랍게도 순식간에 차게 식어 어색할 지경이었다.

파도가 써니 호에 부딪쳐 흩어지는 소리가 밀려왔다.
동시에 여주에겐 쪽팔림도 밀려왔다.


"……."
"……."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으나 그 누구도 차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여주의 귀 끝은 성냥을 가져다 대면 불이라도 붙을 마냥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주앉은 채 서로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선실 쪽 계단 위에서 여주가 그토록 사랑스러워 마지않던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주, 트랑이. 왜 싸우는 거야."
"쵸, 쵸파. 미안, 우리 때문에 깼─"
"결혼은 원래 그렇게 무서운 거야?"
"……."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리며 웅얼대는 물음에 두 연인은 입을 다물었다.
로우는 본능적으로 견문색의 감각을 깨웠다.
깊은 새벽녘의 기척이라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활발했다.


"……하."
"야 임마, 쵸파! 당장 들어와! 미안, 하던 거 계속 해."


선실에서 뛰쳐나온 우솝이 쵸파를 둘러멘 뒤 허겁지겁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로우는 이마를 감싸며 바다가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으면 이 일을 미친듯이 물고 늘어질 비글들의 향연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핳…… 내,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
"로우, 화…… 났어요?"


멱살까지 쥐고서 소리를 질러댈 땐 언제고 이제 와 혼이 난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끙끙거린다.
그 꼴을 지켜보던 로우는 결국 실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제 연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여주도 넓은 등에 단단히 팔을 둘렀다.


"후회하지 마."
"로우야말로요. 나 돌아가도 절대 한 눈 팔지 마요."
"한 순간도 그런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다."
"나도…… 나도 그래요."


애정을 가득 머금은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담긴다.
그렇게도 그리고 또 그렸던 얼굴이었다.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심지어 온 세상을 비추는 커다란 달빛보다도 반짝이는 미소가 두 사람의 입가에 피어났다.
나직이 달싹이는 입술 속에서 달콤한 음색들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사랑해요."













*

쓰고 있다 쓰고 있다 말만 하던 조각글을 이제야 마무리 지었습니다ㅠㅠ

어떻게든 추석에는 맞추고 싶어서 열심히 썼어요!

이로써 로줍썰은 완전히 끝입니다.

더 이상 제가 쓸 남은 이야기는 없어요.

뒤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길게요.

사실 쓰다 보니 드레스로자까지 판이 벌어질 뻔했으나

글이 거의 연재 수준으로 길어질 것 같아 그냥 잘라버렸습니닼ㅋㅋㅋ

더쿠의 망상은 끝이 없어요 참..


다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하트하트 합니당 =]♥